2016년 5월 9일 월요일

독일의 동화속의 왕, 남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Ludwig II 1864~1886)

출처 : 나무위키




보다시피 꽤 미남이다.[1]
취미로 궁전을 짓는 남자

Ludwig II.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별명은 바이에른의 광인왕.
출생 사망 - 1845-1886.
재위 기간 - 1864-1886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막시밀리안 2세의 장남으로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 되었다. 미남,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답게 잘생긴 외모와 190cm에 육박하는 장신[2]으로 매우 인기가 좋았다고 하나 남자 연인이 더 많았다고 한다.

정치보다는 음악과 미술,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15세에 바그너를 만나 바그너의 열렬한
빠돌이지지자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그의 첫 명령은 '바그너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로엔그린에 푹 빠진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일명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는 등 국가적 규모의 팬질을 단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루트비히 2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바그너를 만난 것이 1864년으로, 7주 전쟁 중 바이에른이 편을 잘못 들어 프로이센에게 박살나기 2년 전이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총리 자리를 꿰찬지 이미 2년이 지난 시기로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할만한 인물이다.

장신에 미남인데다가 농부들에게도 격의없이 말을 건넬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좋았으나 신하들에게는 아니었다. 바그너에 대한
팬심총애가 지나쳐서 궁정 귀족들에게 위협이 된데다가 성 만들기에 미쳐서 재정이 거의 파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왕의 과도한 바그너 사랑과 건축 오타쿠답게 계속되는 축성 계획을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 말년에 정신병자로 몰린 그는 신하들에 의해 성에 감금당하고 강제
퇴갤퇴위 당했다[3]. 일단 루트비히 본인의 재산으로 지은 성들이긴 하지만 루트비히의 가족들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고, 그것마저 모자라자 유럽의 왕실에서 빌릴려고 했다. 당연히 내각은 불만이 커졌고, 그것이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4]

이유는 미쳐서 정무를 볼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정말 미쳤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루트비히가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린 굿덴 박사는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서류만 보고서 정신병이라 진단했고, 루트비히 본인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5]했으며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퇴위 후 3일 뒤에 주치의인 굿덴 박사와 함께 산책하다가 실종되었는데 성 근처에 있던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것도 굿덴 박사의 시신과 함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대두되었다. 왜냐하면 사인은 익사였는데 시신이 발견된 슈타른베르거 호수는 무릎밖에 차지 않는 얕은 호수였고 평소 루트비히 2세는 수영을 무척 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굿덴 박사의 사인은 익사가 아닌 질식사였기 때문에 타살이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말년에 자신에게 돈 좀 아끼라고 잔소리해대는 내각을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내각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 소식을 듣자 내각에서 선수를 쳤다. 내각이 준비한 루트비히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보고서가 당시 프러시아의 재상이던 비스마르크의 손에도 들어갔으며, 그는 그 보고서를 보고 같지도 않은 소리며, 내각이 왕을 희생할 셈이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그 보고서에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들이 써져 있었다. 가령 국가 업무를 보지 않는다든지, 일탈에 돈을 많이 쓴다던지, 추운 날에 밖에서 점심을 먹으며 더운 날에 코트를 입었다던지, 식탁에서 매너가 별로라든지, 하인들에게 불친절하게 굴었다던지... 비록 정상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격리시키는 수준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삼촌인 루티폴트 왕자조차 반응이 "내 조카들이[6]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것은 인정하는데, 퇴위는 너무 심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당시로서도 꽤 장신에 꽃미남이다. 더불어 게이였다고 한다. 바그너를 워낙 숭배했던 터라 바그너와 연인관계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그냥 후원자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그너를 슈타른베르크에서 마차로 10분 거리인 별장에서 살게 하고 하루에 두 세번 마차를 보내서 궁정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모자라 호엔슈방가우 성에 초대받을 때마다 바그너도 왕의 침실에 쪽지를 남기곤 했다. 내용인 즉슨 "저는 천사같은 당신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쪽지를 남기는데 사람들이 오해를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친척 중 한 명인 바이에른 공작 막스의 딸 조피와 약혼을 했지만, 도무지 결혼까지는 할 수 없었는지 파혼했다. 이 약혼은 조피의 언니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주선으로 이뤄졌는데, 비교적 친한 사이였던 둘은 파혼 후 소원해졌으나 루트비히의 장례식 때 엘리자베트가 손수 자스민 꽃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사실 요즘은 루트비히의 성적취향 이전에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이해자를 찾으려고 했다는 평가가 대세다. 20살도 안 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친구도 없었다고 하니 우울증은 예상된 결과였다. 그리고 본인도 어떻게든 이해자를 찾기 위해 청소년기부터 좋아한 예술가인 바그너를 초청해서 후원해주고, 또래의 친구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국왕의 친구가 되줄 사람이 흔하지도 않으니 실패한 모양이다.

역사물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에할 요소가 충분하지만 말년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지 다들 거들떠보지 않는 것 같다. 안습. 덕질만 안 했어도 인생이 좀 피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가 돈 때려부어가며 지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당시의 빚을 몇 번이나 갚고 남을 정도로 떼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덕질은 가급적 생산적인 방식으로 17년 동안 공사를 했지만 아직도 미완성 상태로, 정작 루트비히는 이 성에서 3개월 밖에 머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건축 오타쿠 기질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는데,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는 자기가 선물한 집짓기 장난감으로 손자가 만든 집을 보고 '상당히 훌륭한 취향이 드러나 있다'고 평할 정도였다. 왕이 된 후에는 건축가를 고용하되 자기가 구상한 아이디어를 보태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현실에 옮겨 놓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런 괴짜적인 센스는 몇 가지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승마장에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말을 타고선 그 거리를 환산하여 오늘은 어느 지방까지 갔다 왔다는 둥 상상 유랑일기를 쓰기도 했고[7], 낮과 밤을 바꾼 침실이 있어서 밤에는 불을 밝게 켜놓고 낮에는 커튼을 꽁꽁 닫고 잠들기도 했다.

예전에 미군이 이탈리아 몬테카지노의 오래된 수도원을 팔셰름야거가 점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폭격으로 날려버린 적이 있었는데[8], 똑같은 꼴을 당할까봐 두려웠던지 독일군에서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비롯한 고성에는 군인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정식 서한을 미군에 보낸 적도 있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인 루키노 비스콘티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예술을 사랑했고 자유주의자였으며 양성애자였던 비스콘티가 느낀 개인적인 혼란을 루트비히에게 투사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영화 자체는 비스콘티 특유의 아름다운 미장센이 볼 거리.

더불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처럼 일생을 다룬 뮤지컬이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쫄딱 망해서 수출도 안 된다고 한다.(...) 국내 뮤지컬 팬들에게는 일명 '굿덴 송'이라는 악명 높은 곡으로 유명하다. 굿덴 송만큼은 찾아보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1] 이 시절만 해도 어느 정도 살이 찐 상태로 10대 ~ 20대 시절은 꽃미남 왕자의 대명사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 탄 꽃미남 왕자의 클리셰의 효시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2] 요즘 시대로 환산하면 2m 내외라고 한다.[3] 비텔스바흐 가문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루트비히의 동생 오토는 정신분열증으로 아예 병원에 유폐되기도 했다.[4] 집안내력인지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도 명군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샀으나 말년에 국제 꽃뱀 '롤라 몬테즈'에게 홀려 거액을 갖다바치다가 국민들의 반발로 퇴위했던 전력이 있다.[5] 강제로 퇴위당할 당시 되려 쓴웃음 지으면서 느긋하게 "짐이 미쳤다고? 그래, 그 다음은 날 죽이겠군. 그리고 누굴 또 왕위에 올려두고 마음에 안들면 미쳤다고 또 퇴위시킬 건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6] 루트비히 2세와 동생인 오토.[7] 궁 밖으로 멀리 나가질 못하게 하니까 일부러 미친척 했다는 설도 있다.[8] 오히려 독일군은 좋은 엄폐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폭격에 참여한 몇몇 미군은 가톨릭인이라서 괴로워했고 이 수도원에 있던 많은 유물이 잿더미가 되어서 미국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다. 전혀 전략적 효과도 없었으니....